<머리말>
이 책은 한국의 권위주의 체제 시기와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전환된 이후의 시기 동안 채택되었던 주요 사회·복지정책 사례를 대상으로 그 정책들이 어떻게 형성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고 이를 토대로 한국의 복지정책 형성과 복지국가 발전에 관한 일반화된 명제를 제시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 책은 거시적 접근 방식(경향성 분석, ‘이론’ 의존 분석)이 아닌 미시적 접근 방식(사례분석, ‘설명 요인’ 중심 분석)을 채택하되 사례분석을 넘어서는 일반화를 모색하고자 했다는 점이 특징적이라 하겠다.
분석 대상이 되었던 주요 정책사례는 정책창안(policy innovation)이나 정책계승(policy succession)에 해당하는 것들로서 1976년의 의료보험제도, 1986년의 최저임금제도, 1999년의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와 국민건강보험제도였다. 그리고 이 주요 정책사례의 분석을 보완하는 추가적인 분석으로서 권위주의 체제 시기의 정책채택에 대한 통시적인 검토를 수행했고, 자유민주주의 체제 시기의 고용보험제도,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 기초연금제도 사례를 분석했다.
분석 결과, 한국의 주요 사회·복지정책의 형성(정책창안 또는 정책계승)은 정책 환경의 변화와 기존 정책·제도의 유산 및 정책 행위자의 정책선호를 보여 주는 행동 동기(이익의 실현 또는 정책 아이디어·신념의 구현) 등의 요인에 의해 설명될 수 있었다. 이 중 정책·제도의 유산이나 정책환경의 변화는 배경요인이었고, 정책 행위자의 행동 동기가 직접적인 설명요인이었다.
이러한 분석 결과를 통해서 규명된 사항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의 사회·복지정책 형성 과정에서 정책창안이나 정책계승과 같은 주요 정책은 정책환경이 급변하되 관리 가능한 범위 내에 있을 때(‘변화 압박기’) 채택될 수 있었다. 둘째, 한국 사회·복지정책의 채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던 정책 행위자들의 행동 동기는 권위주의 체제로부터 상대적으로 민주적인 체제로의 변화에 따라 ‘이익(interests)의 실현’으로부터 ‘정책 신념·아이디어(ideas)의 구현’으로 변화했다. 그리고 정책 행위자들 간의 정책 신념·아이디어 차이는 그들의 문화 또는 삶의 양식(ways of life)의 차이에서 기인했다. 셋째, 권위주의 체제 시기뿐만 아니라 민주적 체제로 전환된 후에도 한국의 주류 정책 행위자들은 ‘마지못해’ 소극적으로 사회·복지정책을 수용했으며, 그 결과 한국의 복지국가는 제도와 내용 면에서 제한되는 특성을 보이게 되었다. 이 책은 이러한 제한된 특성을 보이는 한국의 복지국가를 ‘소극적 복지국가(reluctant welfare state)’로 명명했다.
이 책에서 제시한 ‘소극적 복지국가’ 개념은 필자가 런던정치경제대학(LSE)에서 수학하던 시기(1993~97년)에 박사과정 워크샵에서 발표했던 학위논문 연구계획서를 통해 모색했던 개념이었다. 논문의 진행과정에서 한국 복지국가의 성격보다 권위주의 체제에서의 사회·복지정책 변동의 설명(‘정책변동 설명요인 접근’의 적용)에 초점을 두는 방향으로 주제가 구체화하면서 이 개념을 더 이상 진전시키지는 않게 되었다. 학위 취득 후 첫 직장이었던 한국행정연구원에서 주로 수행했던 연구는 행정개혁·정부혁신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행정개혁과 정부혁신을 대대적으로 시도했던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영향 아래에서 정부출연 연구원의 하나인 한국행정연구원이 당시의 시대적 흐름을 반영해서 그러한 연구를 진행했던 것은 당연했고, 필자 또한 그러한 연구를 통해 한국의 행정 현실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었다. 대학교로 직장을 옮긴 후에도, 행정개혁·정부혁신이 주된 연구 주제였던 당시 국내 학계의 동향을 반영해서 필자 또한 상당한 기간 동안 이와 관련된 연구를 수행했다. 연구 주제가 필자의 학위논문 주제와는 달랐지만, 1980년대 이후 행정개혁·정부혁신의 흐름을 주도했던 영국에서 수학하면서 익숙했던 주제였기에 비교적 편하게 연구할 수 있었다.
학위논문을 소논문화했던 원고들을 주축으로 해서 일부 교과서적인 논의를 담고 있었던 『정책과정론: 이론, 사례, 비교』(2008)를 예외로 하면, 필자가 정책형성, 정책변동 등 필자의 학위논문 분야에 다시 관심을 돌리고 이와 관련된 연구를 재개하게 된 것은 2010년대 중반 이후였다. 행정개혁 연구에서 이어졌던 행정통제와 행정책임에 관한 저술(『행정통제론』(2013) - 이 책은 2023년 한승주 교수와의 협업으로 개정되었고, 『정부 관료제의 통제와 행정책임』으로 서명을 변경함)이 완성된 이후 마침 대학원생의 학위논문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4대 사회보험 징수통합’, ‘국민건강보험제도’ 등의 정책형성 과정을 접하게 되었다. 이 중 특히 국민건강보험 사례를 분석(2015)하면서 ‘정책변동 설명요인 접근’을 다시 적용하게 되었고, ‘정책변동 설명요인 접근’에 대한 학술적 관심의 재개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사례분석(2019)으로 이어졌다.
한편, 2010년대 중반부터 필자가 학문적 관심을 크게 기울였던 분석 틀은 집단-격자 문화이론(group-grid cultural theory)이었다. 이미 영국 유학 시기에 접했었고, 2000년대 초 일시적으로 사회복지 분야에 문화이론을 적용하는 이론적 논의를 전개해 본 적이 있었지만(“사회복지와 문화”(2004)), 동료 교수들과 함께 또는 단독으로 문화이론의 분석 틀을 본격적으로 적용하기 시작한 것은 2010년대 중반부터였다. 그리고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사례의 분석에서 ‘설명요인 접근법’과 ‘집단-격자 문화이론’을 함께 적용하는 방식을 시도했다.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이 책은 필자가 학위논문 작성 시기에 가졌던 이론적·실제적 관심(정책변동 설명요인 접근, ‘소극적 복지국가’ 개념을 포함한 한국의 사회·복지정책)과 성과, 그리고 그로부터 상당한 기간이 지난 후 다시 초기의 관심으로 돌아와서 이룬 성과들을 토대로 해서 작성되었다. 책의 논리적 구성과 타당성을 갖추기 위해 서론, 이론적·배경적 논의, 체제 전환 후의 정책사례, 결론 등을 포함해서 새로 작성된 부분도 꽤 되지만, 주요 정책사례에 대한 검토는 기존의 성과를 토대로 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책은 필자가 학자 생활에서 가졌던 다양한 이론적, 실제적 관심의 상당 부분을 포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의 이론적 관점 형성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 분은 필자의 학위논문 지도교수셨고, 2025년 1월 3일에 타계하신 Christopher Hood 교수다.
필자는 학위논문에서 Hood 교수께서 제안했던 ‘정책변동 설명요인 접근’을 적용해서 한국의 권위주의 체제 시기에 도입되었던 사회·복지정책의 변동을 분석했고, 그 성과는 주로 이 책의 4장과 5장에 반영되어 있다. 정책변동 설명요인 접근은 또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전환된 후의 주요 정책사례 분석에도 적용되었으며, 이 사례들에 대해서 필자는 Hood 교수를 통해서 처음 접했던 ‘집단-격자 문화이론’을 활용해서 추가적으로 분석하고자 했고, 그 성과는 이 책의 6~8장에 반영되어 있다. 물론 Hood 교수의 학문적 관심은 위의 두 분석 틀에 한정되지 않는다. Hood 교수는 행정이론, 조직론과 인사행정, 정부예산, 정책수단, 행정개혁과 행정통제, 정책변동, 성과관리와 평가, 행정규제, 위험관리 등 행정학과 정책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고, 이는 영국과 미국의 정치·행정학계에서 제공된 여러 차례의 학술상과 공로상 등을 통해서 널리 인정됨을 알 수 있다. Hood 교수가 보여 주었던 광대한 학문적 통로 중 단지 일부만으로도 필자가 학자 생활을 지탱할 수 있었음을 고백하게 된다. 필자가 Hood 교수를 마지막으로 직접 만났던 것은 그분이 한국에서 열렸던 학술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던 2006년이고, 이메일로나마 마지막으로 연락했던 것은 안부를 묻고 어떤 주제를 연구하고 있는지를 알려드렸던 2019년이다. 77세라는 아쉬운 연세에 타계하실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유학 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후 영국과 한국의 지리적 거리를 핑계로 들었지만 실제로는 필자의 소극성과 게으름으로 인해 좀 더 자주 만나거나 연락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여러분께 직·간접적인 도움을 받았다. 먼저 이 책과 관련해서 직접 교류한 적은 없으나,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김영순 교수는 역저 『한국 복지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민주화 이후 복지정치와 복지정책』을 통해 필자가 이 책을 준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김 교수의 책을 접한 후 사례연구를 토대로 보편적인 논의를 성공적으로 전개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고, 김 교수의 접근 방식에 대한 대안을 모색해 보려는 동기를 가질 수 있었다. 인제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이선우 교수와 명지대학교 행정학과 한승주 교수는 이 책의 전체 또는 여러 챕터를 읽고 긍정적인 피드백을 보내 주었다. 필자의 접근 방식과 논의가 학계의 독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확신하지 못하는 중에 두 분이 보내준 긍정적인 반응과 조언은 필자가 용기를 내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또한 책 내용 중 제7장(자유민주주의 체제 전환 후의 복지정책 2: 국민건강보험제도)의 공동 저자인 김호윤 박사는 해당 논문이 이 책에 포함되는 것을 양해해 주었다. 이러한 도움과 호의에도 불구하고, 책에서 발견될 수 있는 오류와 문제가 전적으로 필자의 책임임은 물론이다.
이번 또한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선뜻 출판을 결정하신 윤성사의 정재훈 사장님과 출간에 애써 주신 직원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학자 생활의 시작에서부터 교수 생활의 마감을 앞둔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필자의 옆에서 힘이 되어 주는 아내 오현숙에게 다시 한번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전하며, 올해부터 교수로서의 삶을 시작한 아들 영하와 며느리 나경에게 언제나 사랑과 행복이 함께 하길 기원한다.
2025년 11월
명지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주재현
<차례>
제1장 서론
1. 문제의 제기
2. 분석 대상 정책사례의 선정 및 책의 구성
제2장 이론적 논의: 설명요인 접근과 집단-격자 문화이론
1. 설명요인 접근과 사례분석 지침의 설정
2. 집단-격자 문화이론과 사회복지
제3장 한국의 제도적 특성과 정책형성
1. 정치 및 정책 관련 제도적 특성
2. 정책형성 과정 참여자
3. 정책형성 과정의 현황
제4장 권위주의 체제의 복지정책: 의료보험제도, 최저임금제도
1. 의료보험제도
2. 최저임금제도
3. 소결론
제5장 권위주의 체제의 경제정책과 사회정책 추진
1. 정치적 집행부의 정책추진 동기, 학습효과, 체제의 정당성, 그리고 정책성과
2. 한국의 경제발전 추진과 정치적 집행부의 정치적 동기
3. 정책 성공의 학습효과와 경제정책의 정책 우선순위 확보
4. 사회정책 채택과 정치적 집행부의 정치적 동기
5. 소결론
<부록> 대통령 연설문의 내용분석
제6장 자유민주주의 체제 전환 후의 복지정책 1: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1. 서론
2.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정책형성 과정 분석
3. 정책 행위자의 복지선호도와 문화 분석
4. 소결론
제7장 자유민주주의 체제 전환 후의 복지정책 2: 국민건강보험제도
1. 서론
2. 한국 의료 및 건강보험정책의 변동 과정
3. 국민건강보험 정책변동의 설명요인 분석
4. 기존 의료보험제도의 변화와 관성: 의료수가와 보험료 결정 체제의 변동
5. 소결론
제8장 자유민주주의 체제 전환 후의 복지정책 3: 고용보험제도,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 기초연금제도
1. 고용보험제도
2.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
3. 기초연금제도
4. 소결론
제9장 결론
1. 한국 사회·복지정책의 형성과 복지국가의 발전: 설명요인 접근
2. 한국 복지국가의 특성: 소극적 복지국가
<저자 소개>
주재현(朱宰賢)
1997년 영국 런던정경대학(LSE)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논문제목: Policy Dynamics in South Korea: State Responses to Low Wage Levels and Compensation for Pollutions Victims, 1961-1988), 한국행정연구원 부연구위원과 세종대학교 교수를 거쳐 2003년부터 명지대학교 행정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관심분야는 정책변동, 사회복지정책, 관료제 통제 등이다. 다수의 중앙정부 부처와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공공기관의 자문 및 평가위원으로 활동했고, 한국정책학회와 한국행정학회 등 여러 학회의 임원과 편집위원을 역임했다. 1997년 LSE에서 우수학위논문상(William Robson Memorial Prize)을 받았고, 2010년 명지대학교 학술상, 2020년 한국정책학회 학술상(우수논문상)을 수상했다. 국내외의 저명 학술지에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고, 단독 및 공동으로 여러 저서를 출간했다. 최근의 주요 논문 및 저서로는 “집단-격자 문화이론과 정책형성: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사례분석” (「한국정책학회보」, 2019), “장애인 고용문제에 대한 정부개입의 변화과정 분석: 영국 렘플로이 사례를 중심으로”(「장애와 고용」, 2020; 공저), 「영국 거버넌스 체제 변동 연구」(윤성사, 2021, 세종도서), 「정부 관료제의 통제와 행정책임」(법문사, 2023, 공저), 「집단-격자 문화이론과 정부·행정의 분석」(윤성사, 2024, 학술원 우수학술도서) 등이 있다(jhjoo61@mju.ac.kr).